6/04/2015

스페인의 스톱모션 장편-포제스드



2D 장편 애니메이션인 <치코와 리타(2011)>와 <링클스(2011)>는 흥행성과 예술성 사이에서 균형을 이룬 작품이란 찬사를 받으며 스페인 애니메이션을 전 세계 관객들에게 널리 알리는 역할을 했습니다. 솔직히 개봉된 장편들을 보기 전에는 스페인 애니메이션은 스톱모션 초창기 시대의 인물인 ‘세군도 데 체몬 / Segundo de Chonlon’외에는 별다른 기억이 없었죠. 그러나 최근 스페인 애니메이션계의 과감한 행보는 각국의 페스티벌뿐만 아니라 전 세계 애니메이션계의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지난 5월 스톱모션 장편 애니메이션인 <포제스드/Possessed>가 개봉되었습니다.


공개된 트레일러의 첫인상은 아드만 스튜디오에서 제작한 것이라 착각할 만큼 아드만 판박이여서 놀랐습니다. 관련 기사 검색에서 감독이 아드만에서 10여년을 근무한 애니메이터 출신이라는 기사를 읽고 살짝 웃었습니다. 스톱모션 현장에서 우스갯소리로 일단 손이 작업 스타일을 기억해 버리면 잘하든 못하든 평생 간다는 말이 있는데 이 작품의 감독도 예외가 아닌 것 같습니다.

물론 감독의 애니메이팅 실력뿐만 아니라 퍼펫 및 세트의 디자인과 디테일이 나무랄 데가 없더군요. 돌이켜보면 십여 년 전만 해도 스페인에서 제게 정보 교류와 제작에 관련된 질문 메일들이 왔었습니다. 그런데 그리 길지 않은 시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상상했던 것보다 높은 실력에 도달했다는 사실이 부럽기만 하네요.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 상업 애니메이션의 흥행에 대해서 걱정을 해봅니다. 감독의 이전 작품을 고려해 볼 때 이번 작품은 업계에서 흥행에 안전하다고 판단하는 타겟층, 즉 유아용이나 어린이용보다 연령대가 높습니다. <치코와 리타>같은 2D 장편의 경우 예술성을 전면에 내세웠던 반면, <포제스드>는 재미를 목적으로 한 상업영화란 점에서 타켓층에는 극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치코와 리타>와 비슷한 연령대에 맞춰 애니메이션을 제작했다는 사실에 조금 의구심을 가져봅니다. 애니메이션이 꿈과 환상이라는 것을 믿는 관객이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시장에서 타겟층의 연령대가 비교적 높은 장편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의 흥행성적이 궁금하기 그지없습니다. 왜냐하면 장편 스톱모션은 우리 업계가 앞으로 지향해야 할 목표 중에 하나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술영화나 단편의 경우 흥행이 감독에게 중요한 부분은 아닐 수 있습니다. 그러나 큰 자본과 많은 인력이 들어간 상업영화나 장편애니메이션의 경우는 흥행에 대한 입장이 전혀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아직 <포제스드> 전편을 감상해 보지는 않았지만, 감독이 손으로 기억하는 아드만의 스타일만큼 오류까지도 닮지 않았기를 바라면서 스페인의 애니메이션계의 꾸준한 도전과 실험을 부러운 마음으로 응원해 봅니다 그리고 편애가 심한 우리 애니메이션 관객들을 극장으로 끌어들이는 순수 국산 스톱모션 장편이 언젠가 개봉될 날을 기다려 봅니다.


4/30/2015

2013 아카데미상 후보작 HEAD OVER HEELS





제가 영상 관련 일을 시작한지도 어느덧 20년이 지났습니다. 나름 열심히 작업을 한 덕에 꽤나 많은 작품에 참여했더군요. 그 동안 일한 시간을 돌이켜보면 다양한 이유로 특별한 이야깃거리가 생긴 작품들이 떠오릅니다. Tim Reckart 감독의 단편 <Head Over Heels>도 그런 작품 중 하나입니다. 사실 제 작업 원칙을 바꿔가면서까지 참여한 작품이었는데, 그 결과가 참 좋아서 놀랐더랬죠. 제게는 애니상 수상작의 스텝, 그리고 칸느와 아카데미 경쟁부문 후보작의 스텝이라는 크레딧을 달아준 작품이기도 합니다. 이 작품의 풀버전이 얼마 전 온라인 상에 공개되었습니다.

모르는 분들을 위해 참고로 말씀드리면 이 작품은 영국국립영화학교(NFTS, National film and television school)의 석사과정 졸업작품입니다. NFTS는 칸느나 아카데미상의 단편 경쟁부문에서 프로들과 수상 경쟁을 벌이는, 전 세계에서 몇 안 되는 학교 중 하나로 정평이 나 있습니다. 아드만 스튜디오 소속 닉 파크 감독의 <Wallace and Gromit>은 원래 이 학교의 졸업작품이었습니다.

NFTS의 졸업작품은 교내 각 세부전공이 연계된 연합 프로젝트로 진행됩니다. 영화학교이기에 가능한 시스템입니다. 하나의 단편 프로젝트가 구성되면, 각 전공의 졸업 준비생들이 참여해 협업으로 프로젝트를 꾸려나가죠. 프로젝트에 필요한 관련 전공이 교내에 없을 경우에는 외부 전문가를 초빙합니다. 저도 영국 스튜디오의 추천을 통해 그렇게 스텝으로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Head Over Heels>는 애정이 식은 부부의 관계를 다루고 있습니다. 감독은 부부의 심리적 거리감과 단절된 관계를 형상화하기 위해 남편과 아내의 물리적 공간을 위아래로 분리했는데, 이는 참으로 신선한 설정이었습니다. 그리고 갈등 속에서 생기는 갖가지 해프닝과 화해의 과정을 섬세한 애니메이팅으로 표현했습니다. 이 작품은 디즈니의 단편 <Paperman>에 밀려 아카데미상을 수상하지는 못했지만, 캐릭터의 미묘한 감정선을 드러내기 위해 손짓이나 눈 깜박임까지 섬세하게 표현한 감독의 디렉팅은 아카데미상 후보작에 오른 다른 프로들과도 견줄 만한 실력이었습니다. 또한 이야기꾼으로서 감독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볼 수 있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이 작품의 또 다른 볼거리는 조명입니다. 유심히 살펴보면 조명 사용이 예사롭지 않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적절한 빛을 사용해 명암 대비가 이뤄진 집의 내외부, 그리고 야외 및 일몰의 표현은 약간의 깜박임도 애교로 봐줄 수 있을만큼 훌륭합니다. 조명만을 집중적으로 살펴보기 위해 다시보기를 할 가치가 충분하다고 봅니다.

오랜만에 우리 일상을 소재로 한 스톱모션을 다뤄서 그런지 여러 가지 생각이 듭니다. 그 중 하나는 보편적인 감성을 담은 일상적 이야기가 강한 메시지 전달력을 가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보기에 화려한 듯하지만 어설프거나, 이해할 수 없는 실험적 기법을 사용한 애니메이션보다는 <Head Over Heel> 같은 작품이 훨씬 비범해 보입니다. 인형이니 장비니 기법이니 하는 것에 현혹되지 않고 현실에 있을 법한 스토리만으로도 한 편의 좋은 애니메이션을 제작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이게 애니메이션의 가장 원초적이고 태생적인 목적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4/16/2015

네이버 애니씨어터의 스톱모션 상영


네이버 애니씨어터에서 4월 테마 ‘기법 다반사’의 일환으로 스톱모션 네 편이 해설영상과 더불어 상영되고 있습니다.

정민영 감독이나 김진만 감독과 같이 독립 애니메이션계에서 이미 이름이 나 있는 감독들의 작품을 다시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입니다. 그리고 강민지 감독의 신선한 작품도 못보셨다면 감상하시길 바라구요.

무엇보다도 최근 작품활동을 왕성하게 하고 있는 신예 김강민 감독의 작품<38-39도>을 주목해 볼 만합니다. 그의 작품은 독특한 색감과 비주얼을 기반으로 스톱모션 장르에 대한 새로운 접근을 하고 있습니다. 꽤나 흥미롭고 실험적인 시도입니다. 그런 이유로 작년 프랑스에서 열렸던 스톱모션 전시에 해외 유명감독들과 함께 초청되었죠.

미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김강민 감독의 작품뿐만 아니라 독립 애니메이션계에 포진한 실력파 감독들의 작품을 네이버 애니씨어터를 통해 접할 수 있습니다.


강민지 감독의 <네추럴 어반 네이처>
http://tvcast.naver.com/v/359232

김강민 감독의 <38-39도>
http://tvcast.naver.com/v/359242

김진만 감독의 <오목어>
http://tvcast.naver.com/v/359217

정민영 감독의 <길>
http://tvcast.naver.com/v/362542


3/27/2015

깜찍한 퍼펫 – 블라블라 베이비




눈에 띄는 최신 광고를 지난번 포스팅에 이어 올려봅니다.  위 광고는 쇼타임스튜디오(대표:김준문감독)의 최근 작업물입니다. 본래 김준문감독은 독특한 커리커쳐 스타일의 클레이 애니메이션으로 정평이 나있지만 근래들어 클레이나 퍼펫을 이용한 애니메이션보다는 오브제 애니메이션 작업을 더 많이 하고 있습니다.  이번 광고는 퍼펫을 이용한 김감독의 경쾌한  움직임을 오랜만에 볼 수 있는  영상입니다.


3/22/2015

화제의 국내광고들-코카콜라,그라나사



방송 중인 코카콜라의 ‘사랑편’은 광고자체의 기발함으로 인해 이미 유명세를 타고 있습니다. 이 광고는 2015년 ‘새해편’과 더불어 김준문감독(쇼타임스튜디오)의 짧지만 멋진 애니메이팅 솜씨가 돋보이는 작업물입니다




아래의 영상은 콤마스튜디오(대표:양종표감독,이희영감독)에서 제작한  ‘그라나사 이터널’이란 게임의 온라인 광고입니다. 각 분야 전문스텝 시스템을 지향하는 콤마스튜디오의 작품답게 작업규모나 퀄리티가 타의 추종을 불허 하는 듯합니다. 콤마스튜디오가 네오위즈로부터 의뢰를 받은 이번 작업물은 새롭게 출시된 미소녀게임을 위한 온라인광고입니다. 미소녀게임이란 점과 광고심의가 약한 온라인광고란 점때문에 영상물의 내용중에는 여성분들의 심기를 건드릴 수 있는 부분이 있음을 먼저 말씀드립니다.


<메이킹>



‘루리웹’이란 곳에 자세한 메이킹 사진들이 올라와 있더군요. 관심있는 분들을 위해 링크 올립니다.



3/15/2015

스릴감 넘치는 카체이싱





스톱모션에 흥미가 있는 사람이면 한 번쯤은 방 안에 있는 물건을 이리저리 움직여 촬영해본 경험이 있을 겁니다. 그 중 모형카는 스톱모션을 시작하는 사람들이 애용하는 단골 아이템입니다. 그런 이유로 스톱모션 영상에는 카 체이싱 장면이 자주 등장합니다. 제가 본 영상 중에는 좋은 작업물도 많았지만, 사실 실력보다는 열정에 더 큰 점수를 주고 싶은 작업물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오늘 소개하고 싶은 작품은 미국의 한 스튜디오에서 만든, <Micro Mayhem>이라는 제목의 카 체이싱 영상입니다. 렌즈의 심도를 조절하는 도입부터 마지막 충돌 컷에 이르기까지, 보는 내내 긴장의 끈을 놓지 못하게 만드는 트래킹 촬영과 편집이 일품인 작품입니다. 박진감 넘치는 이번 작품을 보면서 이제까지 봐온 습작 수준의 카 체이싱 영상과는 어떤 부분에서 차이점이 있는지를 곰곰히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엔딩에 나오는 메이킹 스틸 사진을 보면, 트래킹 촬영을 위해 소형 카메라를 사용한 것 이외에 특별히 눈에 띄는 장비가 안보입니다. 그냥 평범한 수준의 홈메이드 장비를 이용해 작품을 완성한 것이죠.

그런데 왜 저화질의 꾸리꾸리한 영상에서 고수의 내공이 느껴질까요? 움직임이 들어간 영상은 누구나 다 만들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움직임이 들어갔다고 해서 다 완성도 높은 애니메이션이 만들어지는 건 아니라고 봅니다.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라는 말이 정말 실감나는 영상 한 편입니다.


3/02/2015

오스카 와일드의 THE NIGHTINGALE AND THE ROSE



이번에 올린 <나이팅게일과 장미 The Nightingale and the Rose>는 지난달 베를린 영화제에서 첫선을 보인 호주의 단편입니다. 이 작품은 2013년 Screen Australia(우리나라로 치면 영화진흥위원회나 컨텐츠진흥원)가 선정한 단편 애니메이션 지원 프로그램 선정작 세 편 가운데 하나죠.

이 애니메이션은 Del Kathryn Barton의 일러스트레이션 책을 토대로 탄생한 작품입니다. 일러스트 작가 Barton은 오스카 와일드의 동명소설을 아름다운 그림으로 재해석해 이미 자국에서 유명 예술상을 받은 바 있습니다. 그리고 이번 작품에도 공동감독으로 참여했습니다.

위 작품은 비록 트레일러에 불과하지만, 관객에게 강렬한 시각적 임팩트와 여운을 남기기에 충분한 영상입니다. 개성이 강한 일러스트레이션을 애니메이션으로 만들기 위해 스톱모션 룩의 컷아웃 기법을 사용했다는 점이 주목할 만합니다.

처음에 이 작품은 스톱모션 냄새가 물씬 나는 컷아웃 작품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손으로 직접 움직였다고 보기에는 애니메이팅이 너무 디테일합니다. 궁금해서 인터넷을 뒤져봤지만, 지금은 아직 개봉 초기라서 작품에 대한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자료가 많지 않습니다.

그나마 제가 찾아낸 건 Screen Australia가 2013년에 지원작 선정 당시 공식 보도자료에서 이 작품이 ‘혁신적인 애니메이션 테크닉(innovative animation techniques)’을 사용할 것이라 밝혔다는 점, 그리고 이 작품에 참여한 Method Studios가 VFX(visual effects 시각적 특수효과) 전문 스튜디오라는 점입니다.

이런 자료를 근거로 내린 잠정결론은 이 애니메이션이 디지털 장비를 사용해 기존 일러스트레이션을 컴퓨터 상으로 옮기고 디지털 컷아웃 기법을 사용해 만든 작품이 아닐까 하는 겁니다.

사실 디지털 컷아웃의 장르적 정체성에 대해서는 의견들이 분분합니다. 그러나 다양한 애니메이션 작품을 기대하는 관객 입장에서는 장르와 관계 없이 눈이 즐거운 이런 참신한 작품들을 환영할 만합니다. <나이팅게일과 장미>는 작년에 이슈가 된 영국의 단편 <The Bigger Picture>만큼이나 올 한 해 영화제를 뜨겁게 달굴 기대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