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4/2015

스페인의 스톱모션 장편-포제스드



2D 장편 애니메이션인 <치코와 리타(2011)>와 <링클스(2011)>는 흥행성과 예술성 사이에서 균형을 이룬 작품이란 찬사를 받으며 스페인 애니메이션을 전 세계 관객들에게 널리 알리는 역할을 했습니다. 솔직히 개봉된 장편들을 보기 전에는 스페인 애니메이션은 스톱모션 초창기 시대의 인물인 ‘세군도 데 체몬 / Segundo de Chonlon’외에는 별다른 기억이 없었죠. 그러나 최근 스페인 애니메이션계의 과감한 행보는 각국의 페스티벌뿐만 아니라 전 세계 애니메이션계의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지난 5월 스톱모션 장편 애니메이션인 <포제스드/Possessed>가 개봉되었습니다.


공개된 트레일러의 첫인상은 아드만 스튜디오에서 제작한 것이라 착각할 만큼 아드만 판박이여서 놀랐습니다. 관련 기사 검색에서 감독이 아드만에서 10여년을 근무한 애니메이터 출신이라는 기사를 읽고 살짝 웃었습니다. 스톱모션 현장에서 우스갯소리로 일단 손이 작업 스타일을 기억해 버리면 잘하든 못하든 평생 간다는 말이 있는데 이 작품의 감독도 예외가 아닌 것 같습니다.

물론 감독의 애니메이팅 실력뿐만 아니라 퍼펫 및 세트의 디자인과 디테일이 나무랄 데가 없더군요. 돌이켜보면 십여 년 전만 해도 스페인에서 제게 정보 교류와 제작에 관련된 질문 메일들이 왔었습니다. 그런데 그리 길지 않은 시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상상했던 것보다 높은 실력에 도달했다는 사실이 부럽기만 하네요.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 상업 애니메이션의 흥행에 대해서 걱정을 해봅니다. 감독의 이전 작품을 고려해 볼 때 이번 작품은 업계에서 흥행에 안전하다고 판단하는 타겟층, 즉 유아용이나 어린이용보다 연령대가 높습니다. <치코와 리타>같은 2D 장편의 경우 예술성을 전면에 내세웠던 반면, <포제스드>는 재미를 목적으로 한 상업영화란 점에서 타켓층에는 극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치코와 리타>와 비슷한 연령대에 맞춰 애니메이션을 제작했다는 사실에 조금 의구심을 가져봅니다. 애니메이션이 꿈과 환상이라는 것을 믿는 관객이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시장에서 타겟층의 연령대가 비교적 높은 장편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의 흥행성적이 궁금하기 그지없습니다. 왜냐하면 장편 스톱모션은 우리 업계가 앞으로 지향해야 할 목표 중에 하나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술영화나 단편의 경우 흥행이 감독에게 중요한 부분은 아닐 수 있습니다. 그러나 큰 자본과 많은 인력이 들어간 상업영화나 장편애니메이션의 경우는 흥행에 대한 입장이 전혀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아직 <포제스드> 전편을 감상해 보지는 않았지만, 감독이 손으로 기억하는 아드만의 스타일만큼 오류까지도 닮지 않았기를 바라면서 스페인의 애니메이션계의 꾸준한 도전과 실험을 부러운 마음으로 응원해 봅니다 그리고 편애가 심한 우리 애니메이션 관객들을 극장으로 끌어들이는 순수 국산 스톱모션 장편이 언젠가 개봉될 날을 기다려 봅니다.


4/30/2015

2013 아카데미상 후보작 HEAD OVER HEELS





제가 영상 관련 일을 시작한지도 어느덧 20년이 지났습니다. 나름 열심히 작업을 한 덕에 꽤나 많은 작품에 참여했더군요. 그 동안 일한 시간을 돌이켜보면 다양한 이유로 특별한 이야깃거리가 생긴 작품들이 떠오릅니다. Tim Reckart 감독의 단편 <Head Over Heels>도 그런 작품 중 하나입니다. 사실 제 작업 원칙을 바꿔가면서까지 참여한 작품이었는데, 그 결과가 참 좋아서 놀랐더랬죠. 제게는 애니상 수상작의 스텝, 그리고 칸느와 아카데미 경쟁부문 후보작의 스텝이라는 크레딧을 달아준 작품이기도 합니다. 이 작품의 풀버전이 얼마 전 온라인 상에 공개되었습니다.

모르는 분들을 위해 참고로 말씀드리면 이 작품은 영국국립영화학교(NFTS, National film and television school)의 석사과정 졸업작품입니다. NFTS는 칸느나 아카데미상의 단편 경쟁부문에서 프로들과 수상 경쟁을 벌이는, 전 세계에서 몇 안 되는 학교 중 하나로 정평이 나 있습니다. 아드만 스튜디오 소속 닉 파크 감독의 <Wallace and Gromit>은 원래 이 학교의 졸업작품이었습니다.

NFTS의 졸업작품은 교내 각 세부전공이 연계된 연합 프로젝트로 진행됩니다. 영화학교이기에 가능한 시스템입니다. 하나의 단편 프로젝트가 구성되면, 각 전공의 졸업 준비생들이 참여해 협업으로 프로젝트를 꾸려나가죠. 프로젝트에 필요한 관련 전공이 교내에 없을 경우에는 외부 전문가를 초빙합니다. 저도 영국 스튜디오의 추천을 통해 그렇게 스텝으로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Head Over Heels>는 애정이 식은 부부의 관계를 다루고 있습니다. 감독은 부부의 심리적 거리감과 단절된 관계를 형상화하기 위해 남편과 아내의 물리적 공간을 위아래로 분리했는데, 이는 참으로 신선한 설정이었습니다. 그리고 갈등 속에서 생기는 갖가지 해프닝과 화해의 과정을 섬세한 애니메이팅으로 표현했습니다. 이 작품은 디즈니의 단편 <Paperman>에 밀려 아카데미상을 수상하지는 못했지만, 캐릭터의 미묘한 감정선을 드러내기 위해 손짓이나 눈 깜박임까지 섬세하게 표현한 감독의 디렉팅은 아카데미상 후보작에 오른 다른 프로들과도 견줄 만한 실력이었습니다. 또한 이야기꾼으로서 감독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볼 수 있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이 작품의 또 다른 볼거리는 조명입니다. 유심히 살펴보면 조명 사용이 예사롭지 않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적절한 빛을 사용해 명암 대비가 이뤄진 집의 내외부, 그리고 야외 및 일몰의 표현은 약간의 깜박임도 애교로 봐줄 수 있을만큼 훌륭합니다. 조명만을 집중적으로 살펴보기 위해 다시보기를 할 가치가 충분하다고 봅니다.

오랜만에 우리 일상을 소재로 한 스톱모션을 다뤄서 그런지 여러 가지 생각이 듭니다. 그 중 하나는 보편적인 감성을 담은 일상적 이야기가 강한 메시지 전달력을 가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보기에 화려한 듯하지만 어설프거나, 이해할 수 없는 실험적 기법을 사용한 애니메이션보다는 <Head Over Heel> 같은 작품이 훨씬 비범해 보입니다. 인형이니 장비니 기법이니 하는 것에 현혹되지 않고 현실에 있을 법한 스토리만으로도 한 편의 좋은 애니메이션을 제작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이게 애니메이션의 가장 원초적이고 태생적인 목적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4/16/2015

네이버 애니씨어터의 스톱모션 상영


네이버 애니씨어터에서 4월 테마 ‘기법 다반사’의 일환으로 스톱모션 네 편이 해설영상과 더불어 상영되고 있습니다.

정민영 감독이나 김진만 감독과 같이 독립 애니메이션계에서 이미 이름이 나 있는 감독들의 작품을 다시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입니다. 그리고 강민지 감독의 신선한 작품도 못보셨다면 감상하시길 바라구요.

무엇보다도 최근 작품활동을 왕성하게 하고 있는 신예 김강민 감독의 작품<38-39도>을 주목해 볼 만합니다. 그의 작품은 독특한 색감과 비주얼을 기반으로 스톱모션 장르에 대한 새로운 접근을 하고 있습니다. 꽤나 흥미롭고 실험적인 시도입니다. 그런 이유로 작년 프랑스에서 열렸던 스톱모션 전시에 해외 유명감독들과 함께 초청되었죠.

미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김강민 감독의 작품뿐만 아니라 독립 애니메이션계에 포진한 실력파 감독들의 작품을 네이버 애니씨어터를 통해 접할 수 있습니다.


강민지 감독의 <네추럴 어반 네이처>
http://tvcast.naver.com/v/359232

김강민 감독의 <38-39도>
http://tvcast.naver.com/v/359242

김진만 감독의 <오목어>
http://tvcast.naver.com/v/359217

정민영 감독의 <길>
http://tvcast.naver.com/v/362542


3/27/2015

깜찍한 퍼펫 – 블라블라 베이비




눈에 띄는 최신 광고를 지난번 포스팅에 이어 올려봅니다.  위 광고는 쇼타임스튜디오(대표:김준문감독)의 최근 작업물입니다. 본래 김준문감독은 독특한 커리커쳐 스타일의 클레이 애니메이션으로 정평이 나있지만 근래들어 클레이나 퍼펫을 이용한 애니메이션보다는 오브제 애니메이션 작업을 더 많이 하고 있습니다.  이번 광고는 퍼펫을 이용한 김감독의 경쾌한  움직임을 오랜만에 볼 수 있는  영상입니다.


3/22/2015

화제의 국내광고들-코카콜라,그라나사



방송 중인 코카콜라의 ‘사랑편’은 광고자체의 기발함으로 인해 이미 유명세를 타고 있습니다. 이 광고는 2015년 ‘새해편’과 더불어 김준문감독(쇼타임스튜디오)의 짧지만 멋진 애니메이팅 솜씨가 돋보이는 작업물입니다




아래의 영상은 콤마스튜디오(대표:양종표감독,이희영감독)에서 제작한  ‘그라나사 이터널’이란 게임의 온라인 광고입니다. 각 분야 전문스텝 시스템을 지향하는 콤마스튜디오의 작품답게 작업규모나 퀄리티가 타의 추종을 불허 하는 듯합니다. 콤마스튜디오가 네오위즈로부터 의뢰를 받은 이번 작업물은 새롭게 출시된 미소녀게임을 위한 온라인광고입니다. 미소녀게임이란 점과 광고심의가 약한 온라인광고란 점때문에 영상물의 내용중에는 여성분들의 심기를 건드릴 수 있는 부분이 있음을 먼저 말씀드립니다.


<메이킹>



‘루리웹’이란 곳에 자세한 메이킹 사진들이 올라와 있더군요. 관심있는 분들을 위해 링크 올립니다.



3/15/2015

스릴감 넘치는 카체이싱





스톱모션에 흥미가 있는 사람이면 한 번쯤은 방 안에 있는 물건을 이리저리 움직여 촬영해본 경험이 있을 겁니다. 그 중 모형카는 스톱모션을 시작하는 사람들이 애용하는 단골 아이템입니다. 그런 이유로 스톱모션 영상에는 카 체이싱 장면이 자주 등장합니다. 제가 본 영상 중에는 좋은 작업물도 많았지만, 사실 실력보다는 열정에 더 큰 점수를 주고 싶은 작업물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오늘 소개하고 싶은 작품은 미국의 한 스튜디오에서 만든, <Micro Mayhem>이라는 제목의 카 체이싱 영상입니다. 렌즈의 심도를 조절하는 도입부터 마지막 충돌 컷에 이르기까지, 보는 내내 긴장의 끈을 놓지 못하게 만드는 트래킹 촬영과 편집이 일품인 작품입니다. 박진감 넘치는 이번 작품을 보면서 이제까지 봐온 습작 수준의 카 체이싱 영상과는 어떤 부분에서 차이점이 있는지를 곰곰히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엔딩에 나오는 메이킹 스틸 사진을 보면, 트래킹 촬영을 위해 소형 카메라를 사용한 것 이외에 특별히 눈에 띄는 장비가 안보입니다. 그냥 평범한 수준의 홈메이드 장비를 이용해 작품을 완성한 것이죠.

그런데 왜 저화질의 꾸리꾸리한 영상에서 고수의 내공이 느껴질까요? 움직임이 들어간 영상은 누구나 다 만들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움직임이 들어갔다고 해서 다 완성도 높은 애니메이션이 만들어지는 건 아니라고 봅니다.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라는 말이 정말 실감나는 영상 한 편입니다.


3/02/2015

오스카 와일드의 THE NIGHTINGALE AND THE ROSE



이번에 올린 <나이팅게일과 장미 The Nightingale and the Rose>는 지난달 베를린 영화제에서 첫선을 보인 호주의 단편입니다. 이 작품은 2013년 Screen Australia(우리나라로 치면 영화진흥위원회나 컨텐츠진흥원)가 선정한 단편 애니메이션 지원 프로그램 선정작 세 편 가운데 하나죠.

이 애니메이션은 Del Kathryn Barton의 일러스트레이션 책을 토대로 탄생한 작품입니다. 일러스트 작가 Barton은 오스카 와일드의 동명소설을 아름다운 그림으로 재해석해 이미 자국에서 유명 예술상을 받은 바 있습니다. 그리고 이번 작품에도 공동감독으로 참여했습니다.

위 작품은 비록 트레일러에 불과하지만, 관객에게 강렬한 시각적 임팩트와 여운을 남기기에 충분한 영상입니다. 개성이 강한 일러스트레이션을 애니메이션으로 만들기 위해 스톱모션 룩의 컷아웃 기법을 사용했다는 점이 주목할 만합니다.

처음에 이 작품은 스톱모션 냄새가 물씬 나는 컷아웃 작품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손으로 직접 움직였다고 보기에는 애니메이팅이 너무 디테일합니다. 궁금해서 인터넷을 뒤져봤지만, 지금은 아직 개봉 초기라서 작품에 대한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자료가 많지 않습니다.

그나마 제가 찾아낸 건 Screen Australia가 2013년에 지원작 선정 당시 공식 보도자료에서 이 작품이 ‘혁신적인 애니메이션 테크닉(innovative animation techniques)’을 사용할 것이라 밝혔다는 점, 그리고 이 작품에 참여한 Method Studios가 VFX(visual effects 시각적 특수효과) 전문 스튜디오라는 점입니다.

이런 자료를 근거로 내린 잠정결론은 이 애니메이션이 디지털 장비를 사용해 기존 일러스트레이션을 컴퓨터 상으로 옮기고 디지털 컷아웃 기법을 사용해 만든 작품이 아닐까 하는 겁니다.

사실 디지털 컷아웃의 장르적 정체성에 대해서는 의견들이 분분합니다. 그러나 다양한 애니메이션 작품을 기대하는 관객 입장에서는 장르와 관계 없이 눈이 즐거운 이런 참신한 작품들을 환영할 만합니다. <나이팅게일과 장미>는 작년에 이슈가 된 영국의 단편 <The Bigger Picture>만큼이나 올 한 해 영화제를 뜨겁게 달굴 기대작입니다.


2/23/2015

리듬과 움직임 – WIRE & FLASHING LIGHTS





위 작품은 음악을 해석한 한 편의 뮤직 비디오라고 볼 수 있는 스톱모션 영상입니다. 보기에 따라서는 실험적이라고 평가할 수도 있겠네요. 이 작품은 하나의 일관된 스토리를 가지고 있는 건 아니지만, 음악과 영상이 만나면 얼마나 폭발적인 에너지를 가질 수 있는지 보여주는 좋은 사례입니다.

애니메이션의 거장 노만 맥클라렌(Norman McLaren) 감독은 초기작품에서 스크래치온필름(scratch on film) 기법을 사용해 생성된 사운드에 맞춰 이미지를 움직이는 시도를 한 바 있습니다. 당시 애니메이션에서 이런 작업은 이미지와 소리에 대한 실험의 서막이자 혁명적인 아이디어였습니다. 청각적 요소를 시각화해 볼 생각은 좀처럼 하지 않던 때였으니까요. 이후 구체적인 사용기법은 달라졌어도 이처럼 사운드를 시각화하려는 실험적 시도는 계속 이어졌습니다.

사실 영화와 애니메이션에서 음악은 영상의 극적인 효과를 부각시키고 관객의 몰입도를 높여주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그러나 위 작품에서는 오히려 영상이 음악을 부각시켜주는 듯 합니다. 맥클라렌 감독이 시도한 실험의 연장선상에 있다고나 할까요. 보이지 않는 것들을 시각화하려는 노력은 어느 장르에서나 가장 창조적인 예술 행위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p.s. 우리나라에서는 Norman McLaren 감독의 이름을 ‘노만 맥라렌’이라 표기하지만 원래 발음대로 ‘노만 맥클라렌’으로 쓰는 게 맞다고 봅니다.

1/27/2015

라이트 페인팅 단편 ‘LIGHTSPEED’




하나의 제작방식이 탄생해서 대중화되고 기교적으로 발전되는 양상을 보고 있자면 살아있는 생물의 진화를 보는 듯 합니다. 오늘 소개할 라이트 페인팅(light painting)도 그렇게 변화하는 중입니다.

라이트 페인팅은 빛과 카메라의 노출을 이용해 이미지를 만드는 것으로, 디지털 카메라와 휴대용 기기의 보급을 통해 급속도로 확산된 예술형식입니다. 몇몇 아트그룹의 작품활동 및 일반대중의 취미로 시작된 이후 상업광고에 등장하면서 그 전성기를 누렸지요.

제가 라이트 페인팅에서 항상 흥미롭다고 생각하는 건 카메라 렌즈를 통해 시간의 길이를 조절하며 나름의 시간과 공간이 있는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낸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타임랩스화된 현실’과 ‘새로이 창조된 세계’가 공존한다는 점도 재미있는 특징 중 하나예요. 또한 라이트 페인팅에서 볼 수 있는 이미지는 아이들이 즐겁게 낙서한 것 같아서 몽환적인 느낌이 더욱 두드러지죠.

지금은 전에 비해 라이트 페인팅의 인기가 어느 정도 사그라든 듯 보입니다. 그런데 최근 라이트 페인팅에 내용과 형식의 측면에서 새로운 변화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전문작가들이 새로운 시도를 하고 있는 것이죠. 이러한 전문작가들 중 하나가 Darius Twin이라는 별명으로 알려져 있는 미국의 라이트 페인팅 작가 Darren Pearson입니다. 위에 링크된 영상은 그의 단편 <Lightspeed>입니다.

이제까지는 대다수 라이트 페인팅 작업물들이 주로 팀 작업 위주의 협업을 통해 만들어졌습니다. 그러다보니 ‘재미와 즐거움’이 작업의 주된 목적이 되었습니다. 이게 바로 라이트 페인팅이 전 세계로 빠르게 퍼져나간 이유일 겁니다. 공동창작 활동을 위한 새로운 장르로 등장하게 된 거지요.

Darren Pearson 감독은 재미와 즐거움을 위한 일종의 놀이수단이었던 라이트 페인팅에 영상언어를 도입하는 실험을 하고 있습니다. 일련의 이미지가 중심이었던 라이트 페인팅을 프레임 사이의 의미를 전달하는 시각적 매개체로 전환하려는 감독의 의도가 엿보입니다. 타입랩스화된 현실은 이제까지는 그림을 그리기 위한 캔버스와 같았지만, Pearson 감독은 이를 배경 제공이라는 공간의 측면에서 접근하지 않고 이야기를 전개하기 위해 사용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한 변화로 보입니다. 또한 이 작품이 차별화되는 점은 이미지에 부피감을 부여하는 드로잉 방법을 사용했다는 겁니다. 선을 사용해 이미지를 표현하던 이제까지의 방식과는 다르게 말이죠. 이 때문에 감독이 스스로를 라이팅 조각가라 부르지 않나 싶습니다.

Darren Pearson 감독의 작품을 감상해보면 라이트 페인팅(혹은 light sculpture 빛으로 만든 조각)이라는 장르의 매력에 흠뻑 취할 수 있을 겁니다. 아래는 그의 이전 작품 <Light Goes On>입니다.





1/11/2015

JIN AIR 스톱모션 광고






세대를 아우르는 마니아층을 보유한 레고(LEGO)나 플레이모빌(Playmobile) 같은 피규어들은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의 오브제로 자주 사용된 바 있습니다. 최근에는 스톱모션 스타일의 CG영화 <레고 무비(The LEGO Movie, 2014)>가 개봉되어 그 사그라들지 않는 인기를 다시 한 번 과시하기도 했지요.

우리나라에서도 2014년 11월 플레이모빌을 이용한 진에어 광고가 런칭되었습니다. 1차 광고인 ‘후쿠오카’편의 뒤를 이어 12월에는 2차로 ‘코타키나발루’편이 나왔구요. 이 두 편의 광고는 친근한 피규어들의 신나고 경쾌한 리듬감을 볼 수 있는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입니다. 애니메이팅이 가능하도록 설계된 스톱모션용 인형이 아닌, 움직임에 제약이 있는 피규어를 그대로 사용한 탓에 애니메이팅에 한계가 있음에도 불구, 광고 컨셉에 맞는 흥겨운 분위기와 움직임이 멋지게 표현된 광고입니다.

이 광고를 제작한 사람은 ‘쇼타임 스튜디오‘의 김준문 감독입니다. 이미 업계에서 그는 자신만의 독특한 캐리커처 디자인부터 제작까지 모든 과정을 혼자 소화할 수 있는 멀티플레이어 감독으로 정평이 나 있습니다. 김준문 감독의 대표작인 무한도전의 클레이 애니메이션과 메리츠 화재의 퍼펫 애니메이션 광고는 다들 한 번쯤 접해보신 적이 있을 겁니다.



작년 12월에는 국내에서 제작한 스톱모션 광고가 미디어에 유달리 자주 노출되었습니다. 최소 네 편이었던 걸로 기억하고 있는데요. 확인해본 결과, 모두 쇼타임 스튜디오에서 제작한 광고였습니다. 이렇게 많은 수의 광고가 동시다발적으로 방영된 점, 그리고 그 모든 광고를 특정 스튜디오에서 전부 만들었다는 점은 스톱모션 업계에서 그리 흔한 일이 아닙니다.김준문 감독은 한 달에 최소 두 편 정도의 광고 제작에 참여한다고 합니다. 많게는 한 달에 네 편이나 되는 광고에 참여한다고 하니 준비와 촬영기간이 짧은 광고인 점을 감안하더라도 가히 살인적인 스케줄을 소화하고 있더군요.

김감독의 쇼타임 스튜디오를 생각하면 클레이 애니메이션이 자연스럽게 먼저 떠오릅니다. 클레이 애니메이션의 거장 윌 빈튼도 극찬한 김준문표 캐리커처 캐릭터의 이미지가 강하게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쇼타임 스튜디오의 포트폴리오를 찬찬히 살펴보면 최근 몇 년간은 스톱모션의 다양한 세부 장르에 도전하고 실험하는 시기였고 지금은 10여년이 넘은 그의 치열했던 경력에서 나온 솜씨가 완숙기에 접어들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김준문 감독은 컷아웃, 픽실레이션, 페이퍼, 피규어, 의류, 가방 등 거의 모든 오브제로 스톱모션 애니메이션 광고를 만들고 있습니다. 오히려 다루지 않은 오브제를 찾는 게 더 빠를 정도죠. 지상파나 케이블, 그리고 인터넷에서 봤던 다양한 스톱모션 광고들 중 열에 아홉은 김준문 감독의 쇼타임 스튜디오에서 만든 거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KT, SK텔레콤 등의 통신사 광고에서부터 다음, 코카콜라 같은 대기업 광고, 그리고 유아용 장난감 광고까지 말이지요.

우리나라에서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을 이용한 광고나 홍보영상 제작에 참여할 경우, 손이 여간 빠르지 않은 애니메이터가 아니고서는 광고주와 광고 프로덕션을 만족시키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 제작기간이 매우 짧거나 애니메이터가 광고 촬영장에 당일 투입되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지요. 실제로 어느 프로덕션이 알음알음 고용한 애니메이터의 서투른 실력 때문에 촬영 당일 광고주 앞에서 낭패를 봤다는 얘기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의 제작을 실제 담당하는 사람이 어떤 작업을 얼마나 많이 했느냐, 즉 다시 말해 ‘경험’이 중요한 건 광고 촬영현장에서 자주 발생하는 돌발상황에 빠르게 대처할 수 있는 노하우와 순발력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알기로 광고 촬영시 혼자 인형과 세트를 수정하며 애니메이팅까지 할 수 있는 경험 많은 감독급 인력은 두어 명에 불과합니다. 김준문 감독은 광고 프로덕션과 여러 작업을 함께 하며 쌓은 신뢰를 통해 지금처럼 많은 작품을 제작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사실 스톱모션 스튜디오 입장에서 세트와 퍼펫을 이용한 스톱모션은 오브제를 이용한 스톱모션보다 시간과 노동력의 측면에서 더 큰 부담이 되는 게 사실입니다. 우리나라 현실에서는 퍼펫 애니메이션을 이용한 광고와 홍보물의 단가가 들인 시간과 노력에 비해 저평가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쇼타임 스튜디오의 포트폴리오를 보고 있자면 김 감독이 효율적인 스튜디오 운영에 대해 고심한 흔적들을 조금이나마 읽을 수 있습니다. 김 감독은 우리나라에서 클레이 애니메이션의 자타공인 최고 실력자이면서도 본인의 주특기 장르만이 아니라 스톱모션 세부 장르로까지 영역을 확장하는 현실적인 선택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우리가 환영할 만한 건 우리나라에도 여러 가지 오브제를 사용해 스톱모션의 다양한 모습을 일반인에게 보여주는 쇼타임과 같은 스튜디오가 존재한다는 점입니다. 스톱모션하면 퍼펫이나 클레이애니메이션이 전부라고 알고 있는 일반적인 선입견을 깨고 있다는 말이죠. 이거야말로 진정한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의 대중화’가 아닌가 합니다.

스톱모션 스튜디오의 운영이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김준문 감독의 ‘쇼타임 스튜디오’는 광고시장의 다변화된 니즈에 빠르게 적응하면서 한사람의 천재성을 기반으로한 감독 중심의 스튜디오 형태를 정착시키고 있습니다. 또한 스톱모션의 확장성에 초점을 맞추면서 상업 스튜디오의 생존방법을 모색하고 있기도 하지요. 반면, 앞서 다른 포스트에서 다룬 적이 있는 양종표, 이희영 두 감독의 ‘콤마 스튜디오’의 경우에는 척박한 한국 스톱모션 환경에서 유기적인 팀 작업을 위한 전문가 스텝 시스템을 꾸준히 실험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 두 스튜디오는 지속적으로 작품 활동을 하면서 한국적 스튜디오 시스템을 연구하는 것만이 살아남는 방법이라는 선례를 한국 스톱모션 역사에 남기고 있습니다. 저는 전설의 사업가 감독들이 자신들의 스튜디오가 스톱모션의 역사를 새로 쓰고 있다는 등의 번지르르한 사탕발림으로 젊은 스텝들을 선동했야만 했던 시절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지저분한 흔적만 남기고 사라져버린 지금 이 순간, 더 명확해진 점이 있다면 그건 바로 우리 스톱모션 역사가 꾸준히 활동하는 작업자의 몫이라는 사실입니다. 오늘도 촬영을 하고 있을 쇼타임 스튜디오의 김준문 감독 같은 대중예술 작업자들 말입니다. 2015년 새해에는 좋은 작업자라고 불릴 만한 사람들을 많이 만날 수 있는 한해가 되었으면 합니다.